무대라는 이름의 해방구: 세대를 잇는 연극, 그리고 막 뒤의 아이들

1967년, 열여덟 살의 수재나 케이슨이 자살 기도로 매사추세츠주 벨몬트의 맥린 병원에 입원했을 때만 해도 이 우울한 경험이 한 세대를 대변하는 서사가 될 줄은 몰랐을 거다. 2년여의 정신 병동 생활과 그곳에서 만난 동료 환자들과의 교감을 담아낸 그녀의 베스트셀러 회고록, 그리고 처피뱅을 한 매력적인 소시오패스 리사(안젤리나 졸리)와 수재나(위노나 라이더)가 등장했던 1999년의 동명 영화 ‘처음 만나는 자유(Girl, Interrupted)’는 세상으로부터 오해받고 방황하는 젊은 여성들에게 일종의 바이블로 자리 잡았다.

이제 이 텍스트가 퍼블릭 시어터(The Public Theater) 무대 위에서 새로운 세대를 위해 부활한다. 마티나 마요크가 극본을, 에이미 만이 음악을, 소냐 타예가 안무를 맡은 이 작품은 조 보니의 연출 아래 기억을 더듬어가는 비선형적 서사의 음악극으로 재탄생했다. 보니 연출에게 무대 세트는 단순히 맥린 병원의 내부를 구현하는 것을 넘어 “수재나의 복잡한 내면 그 자체”로 기능한다. 대중이나 프로젝트에 참여한 배우들에게는 영화판이 훨씬 익숙하겠지만, 극본을 쓴 마요크는 케이슨의 원작 회고록이 지닌 날것의 매력에 완전히 매료됐다고 고백한다. 건조한 위트와 명철한 시선, 유머와 가슴앓이가 뒤섞인 그녀의 목소리. 마요크의 표현을 빌리자면 “군더더기 없는 탄탄한 언어로 지면 위에서 그토록 시끄럽게 살아 숨 쉬던 비범한 캐릭터들”은 이제 무대 위에서 줄리아나 캔필드(수재나 역)와 킹 프린세스(리사 역)라는 압도적인 캐스팅을 통해 육화된다. 여기에 발레리, 토리, 그레이스, 데이지, 그리고 극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불길한 ‘남성적 존재(Male Presence)’까지, 병원의 거주자와 스태프들 역시 비범한 앙상블을 통해 무대 위에서 생생하게 호흡한다.

이처럼 무대는 오래전부터 방황하는 청춘들의 파편화된 감정을 온전히 껴안고 그들의 목소리를 증폭시키는 공간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연극의 치유와 연대의 힘이 화려한 오프브로드웨이 프로덕션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시선을 뉴욕에서 워싱턴주 중북부로 돌려보면, 매년 봄 십대들의 날것 그대로의 에너지가 폭발하는 또 다른 무대를 마주하게 된다. 지난 5년간 누메리카 공연 예술 센터(PAC)는 매년 하룻밤을 토니상 시상식과 왁자지껄한 지역 가족 모임 그 중간 어디쯤으로 변모시켜 왔다. 반짝이는 스팽글과 조명, 열기 가득한 오프닝 넘버와 벅찬 수상 소감. 정장과 무대 분장을 한 십대들이 로비로 쏟아져 나오고, 각 학교 연극반 디렉터들은 마치 비밀 레시피를 교환하듯 무대 의상과 조명 세팅 꿀팁을 나눈다.

애플 어워즈(Apple Awards)라는 이름의 이 행사는 프로듀서이자 PAC 기술 감독인 카일리 보그스가 “열정에 빚진 프로젝트”라 부를 만큼 모두의 예상을 깨고 엄청난 규모로 성장했다. “이제 겨우 5년 차인데, 체감상으로는 한 11년은 훌쩍 넘은 것 같아요.” 보그스의 헛웃음 섞인 농담에는 그간 행사 규모를 키워온 치열함이 묻어난다. 원래 워싱턴주 중북부 고등학교들의 연극 프로그램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시상식은 이제 위나치, 이스트몬트, 캐시미어 등 여러 지역 학교들을 아우르는 거대한 생태계가 되었다. 지역 연출가, 음악가, 기술 전문가들로 구성된 자원봉사 심사위원단은 학기 내내 각 학교의 공연을 관람하며 피드백을 제공하고 후보를 선정한다.

하지만 화려한 시상식 자체는 이 프로젝트가 가진 서사의 일부에 불과하다. 시상식 당일, 학생들은 PAC에 모여 연기와 춤, 무대 기술을 다루는 워크숍에 참여하며 시간을 보낸다. 동시에 교사들은 따로 원탁에 모여 예산 확보나 의상 제작, 그리고 크고 작은 학군에서 어떻게 예술 프로그램을 소멸시키지 않고 버텨낼 것인가에 대한 현실적인 딜레마를 털어놓는다. 고등학교 연극반을 이끌다 보면 마치 외딴섬에 홀로 고립된 것 같은 묘한 단절감을 느끼기 십상인데, 이 연대가 주는 힘은 제법 실질적이다. 네트워킹을 통해 조명이나 음향 장비 지원을 끌어내기도 하고, 서로 세트를 빌려주며 각자 고군분투하던 프로그램들이 앙상블을 이루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보그스의 말처럼 “결국 이 모든 과정이 더 나은 프로덕션을 만들어냈다.”

게다가 최근 이 어워즈는 스포트라이트가 닿지 않는 막 뒤편으로 시선을 확장했다. 조명, 음향, 무대 제작을 맡은 테크니컬 스태프 학생들을 위한 부문을 신설한 것이다. 배우 지망생들은 넘쳐나는데 정작 그들의 무대를 지탱할 프로덕션 인력은 턱없이 부족해 업계 전체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 날카로운 행보다. 심사 기준 역시 학교의 재정 상태나 화려한 프로덕션 밸류가 아닌, 오직 학생의 창의성과 캐릭터 소화력에 맞춰져 있다. 화려한 세트와 역사를 자랑하는 학교가 상을 싹쓸이할 거란 편견은 보기 좋게 빗나간다. 예기치 못한 원석을 발굴해 내는 것, 보그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대사 한 줄 없이 구석에 서 있던 ‘3번 나무(Tree Number Three)’ 역할의 학생이 기어코 관객의 넋을 빼놓고 쇼를 훔쳐버리는 그 맹렬한 순간이야말로 이 시상식이 지키고자 하는 핵심 가치다.

다가오는 5월 14일, 브로드웨이 안무가이자 고향으로 돌아온 그리어 기시의 지휘 아래 학생들이 함께 준비한 거대한 합동 넘버가 무대 위에 오를 예정이다. 뉴욕 한복판에서 수재나의 파편화된 기억이 세련된 극으로 재탄생하는 순간이나, 지역 극장의 작은 무대에서 ‘3번 나무’가 자신만의 존재감을 뿜어내는 순간은 본질적으로 맞닿아 있다. 완벽하게 다듬어지지 않았기에 더욱 뜨겁게 진동하는 청춘들. 무대는 그렇게 이들의 서툰 언어를 기꺼이 품어내며, 세대와 지역의 경계를 지운 채 각자의 ‘처음 만나는 자유’를 끊임없이 써 내려가는 중이다.